第 13,14 講 和合

무엇을 調하는 것은 그것이 잘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調할 때는 이 잘 되지 않으니까 調할 것 아닙니까. 해서는 하지 않습니다. 는 절로절로 좋으니까. 그런데 가스가 꽉 차있다면 될 거예요.

이라. 여러 이라 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나는 調하면 문득 슬퍼지는 듯한 그런 마음이 들어요. 왜냐? 하나인데 쪼개졌으니까 이란 말이 나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나잖아요. 생각하면 할수록 하나거든요. 빅뱅 에 하나였잖아요. 또 그 하나가 서로 이렇게 을 해서 열렸다 해도 가 서로 어우러져서 하게 를 맺으면서 흘러가는 하나의 네트워크이고 하나의 인드라망입니다. 그런데 쪼개졌다고 생각하고 쪼개져서 서로 편을 가르고 싸웁니다. 아프니까 아프지 말아야 될 것 아니냐, 우리가 을 해야 할 것 아니냐 하고 調 하는 입니다.

調 한다, 調 한다 하지요? 강조도 어찌 보면 슬픈 이야기입니다. 을 볼 때 합니다. 이 어째서 나의 가 되었는가 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스님이 되고 보니까 하는 것이 이었습니다. 은 스님입니다. 그런데 어느 을 보니까 이에요. 하는 무리라야 이라는 겁니다. 이 되려면 하는 무리라야 되는데 인 스님들이 이 아니라 을 잘 못해요. 뭔가 에너지가 서로 어긋납니다. 하는 무리라야 인데 그것이 아니구나, 해서 이 테마가 되었어요. 이 테마가 되어서 정말 우리 이 되게 하려면 어찌해야 될 것인가. 이렇게 설문을 하게 됐습니다. 모든 스님들이 이 돼야 하겠는데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것인가. 모든 사람들이 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은 두고 을 보면 이 보이는 게 아니라 가 보여요. 여기면서 사람들을 보면 하는 이 더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 더 많이 보입니다.

그리고 10 년 걸렸습니다. 이 이러하면 되겠구나 하고 으로 딱 잡혀서 셋으로 가 될 때까지 10년 걸렸습니다. 이라고 하는 것을 해 보면 두 사람 사이에 서로에 이 적정선으로 되는 것이 입니다. 서로 사이에 이 흘러야 입니다 그래서 다, 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여러, 를 가만히 보세요. 이라고 하면 便한 나의 이 얼마나 되는가. 나는 便 이 얼마나 되는가. 을 100으로 놓고 두 사람의 합이 200이 만점이라고 한다면 여러들은 내외간에서는, 혹은 부자지간에서는, 에서는 는 200 점 만점에 몇 점이나 됩니까?

그러면 그 은 왜 합니까? 왜 한가 물으면 여러 들은 어떤 생각을 먼저 합니까? 나는 있고 없음의 를 먼저 생각해요. 이 없다고 하면 어때요? 나하고 너하고 이 없다, 이 부재하다, 가 낮다고 하면 그 가 고통입니다. 그리고 전쟁입니다. 이 있으면 어때요? 기쁨입니다. 대내으로 보면 기쁨이고 대외 으로 에서 보면 평화입니다. 이 있고 없음은 기쁨과 평화의 있고 없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의 방법론이 하지요.

의 방법론을 선명하게 잡는데 10년 걸렸다고 하면 좀 심하지요? 이것을 이야기할 때마다 늘 해요. 무얼 가지고 10 년이나 걸렸을까 합니다. 그런데 히 10 년 걸렸습니다. 그것만 갖고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테마가 던져지고 나서 확연하게 이 얻어진 건 10년 후였습니다. 10년 만에 얻어진 방법론이 무엇이냐 하면 ‘화 3 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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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3 요는 대단히 논리적입니다. 나하고 여기 앉아 계신 원님 사이에 이 된다고 한다면 내 속에서 원님에 이 높고 원님 속에 나에 이 높은 것이 두 사람 사이의 입니다. 그래서 내 에서 생각을 해봅니다. 내 속에서 원님에 , 상대에 이 높으려면 어찌해야 되겠냐 하는 겁니다. 해요. 얻어 놓고 보니 했습니다. 보는 눈이 좋으면 내 속에 이 높아져요. 눈입니다. 내가 저 사람에 해서 이 좋거나 좋지 않거나 하는 것은 무엇을 보고 그렇습니까? 저 사람 사는 모습을 보면서 점수를 낮게 주면 안 좋습니다. 그러니까 이 눈이 점수를 후하게 주는 눈이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점수를 후하게 줄 수밖에 없는 것이 저 사람의 를 보면 볼수록 신비 무궁해요. 점수는 높을 수밖에 없어요. 제대로 보면 볼수록. 그러니까 눈이 좋아야 합니다. 그래서 보는 눈을 진다. 이것을 하나로 잡았습니다. 이제 나는 내 앞의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는 내 눈이 좋아지면 됩니다. 그러면 내 이 높아집니다. 이렇게 하면 실제는 놔두고라도 으로 OK가 됩니다.

두 번 째, 나는 이 이렇게 높아져서 좋은데 도 나에 이 높아져야 합니다. 나는 너에 이 높아져 노 프러블럼인데 너는 어떠냐? 네가 낮은 것은 어떻게 하느냐? 그러면 내가 너에게 떡도 사주고 뭣도 사주고 하면서 나에 한 눈좀 고쳐다오, 고쳐다오, 이렇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다가 가만히 보니까 눈을 고치려고 할 도 없이 내가 여기에서 그 눈에 맞추어주면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모습 가 나온 것입니다. 모습을 좋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개로 되는 거예요. 내 눈 좋아지니 OK. 내가 모습을 져버리니 속에 들어있는 나에 OK 가 되는 겁니다.

이 두 개를 답으로 내려놓고 큰 밥값이라도 한 것처럼 滿스러웠습니다. 여러들, 상상이 됩니까? 이 답을 사흘 만에 내렸다고 하면 별로였을 텐데 10년 만에 내린 답입니다. 이 2개를 마음속으로 완료 해놓고, 야, 이거 노벨평화상감이다, 이랬다니까요. 노벨평화상을 어떻게 보고 이런 것을 가지고 노벨평화상감이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나로서는 노벨평화상감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가만히 이 두 개를 잡고 며칠을 놀았어요. 눈을 지는 데는 자신있다는 은 들었어요. 그런데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생각해 보았더니 모든 사람들 눈에 들도록 내 모습을 지려면 그것도 제법 하겠더라고.

눈은 어느 된다고 하는데 내 모습에 해서 자신이 점점 없어지는 거예요. 전라도 사투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나는 전라도 사투리를 안 쓰고는 말을 못 하잖아요. 전라도 사투리를 고치기 해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이건 만만한 일이 아니라고요. 사람들이 나한테 스님은, 는 좀 날씬해야 돼, 하는데 나는 이렇게 임꺽정이처럼 생겼거든요. 다이어트만 하더라도 쉬운 일이 아니야. 또 얼굴이 좀 선비처럼 생겨야 하는데 나는 임꺽정이처럼 생겼어. 이것도 쉬운 것이 아니야. 아니, 보는 눈, 보이는 모습, 이것은 이론만 나왔을 뿐이지 에 가서는 영 안 되는 겁니다. 또 코고는 것이 징하게 싫은 사람이 있어요. 나는 이마를 붙였다 하면 코를 골기 하는데 그것도 야. 이래가지고 모습 지키기도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 또 나에겐 때 벗기는 이 있어요. 목 언저리에 손을 넣고 때를 벗긴다고요. 히 아무개 스님 같은 사람은 이것을 질색합니다. 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해서 안 한다고 결심했는데 돌아서서는 막 벗기고 있어요. 이런 으로 몸에 익어져 있는 이나 타고난 것을 어떻게 지우느냐 막막해 집니다.

그러고 보니 눈을 진다 하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제대로 되기만 하면 좋은 지만 현실성이 정말 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이 두 개를 어쩔 것이냐, 폐기처분 할 것이냐 하고 보니까 폐기처분 할 일 까지는 아닙니다. 이것을 해 가야 합니다. 보는 눈, 보이는 모습 다 해 가야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론이라고 내놓기에는 딱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식이더라고요. 자, 우리 이 고양이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고양이 목에 방울만 달아 버리면 된다. 그러니까 야, 좋다, 하면서 다 를 쳤어. 마치 이 두 개 만 지면 된다고 하듯이 를 쳤어. 그런데 누가 방울을 달고 올까? 하니까 내가 달겠습니다, 하는 쥐가 아무도 없었다는 거지요. 이처럼 현실성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좋았던 노벨상감이 김이 쏙 빠지면서 이것을 폐기처분하기는 너무 아까우니까 폐기처분하지 않고 보존을 하되, 이것을 해서 어찌 해보자. 그런데 이것을 론으로 내놓기는 좀 그렇다, 했지요.

이래놓고 어째야 할 것인가 하다가 세 번 째로 가 나온 것입니다. . 잘 한다. 잘 나눈다. 이 를 내놓고 보니까 으로 이 문화는 쫘악 펼쳐져 있더라고요. 그리고 주변에 보니까 그저 무엇을 한다하면 서로 나누잖아요. 나눠서 합니다. 국제으로 가 생겼다 하면 외교관들이 서로 만나서 나누잖아요. 그러니까 이 으로 하나의 로, 평화의 로, 로, 토착화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끌어다 붙여놨어요. 보는 눈, 보이는 모습은 어렵더라도 이것으로 보충을 하면 좋겠다. 이것은 을 하면 한 만큼 좋겠다 했습니다.

보는 눈을 진다, 보이는 모습을 진다, 잘 한다. 이런 으로 해놓고는 아 그래, 이나마 이로 해서 滿을 하자. 보는 눈, 보이는 모습 쪽에서 약간 기운이 빠졌지만 이것도 되면 좋으니까 해 가기로 하고 그나마 는 좀 쉽지 않느냐. 이래 놓고 내 을 보니까 인품 에서는 제로였습니다. 속에 한 마음이 있어도 을 못하고 3년간을 끙끙 거리면서 가지고 다녀요. 우리 스님에 해서 유감의 마음이 요렇게 하나 딱 있다 해도 “큰스님, 저 좀 예쁘게 봐 주세요”라고 한마디만 하면 될 것인데 그걸 못하고 음, 음 하고 있어요. 라고 하는 덕목으로는 내가 너무 안 되는 겁니다. 이 문화는 에서 개척 해온 것이고 의 엔카운터는 완전히 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문화를 엮어오고 개척을 해오면서 내가 일번 수혜자가 됐어요. 에 말을 못할 까닭이 없어요.

지금은 싸움도 할 수 있고 악을 쓸 수도 있어요. 옛날에는 악도 썼어요. 내 동생들한테는 악을 썼어요. 내 동생들, 안정권에서는 악을 썼는데 약간만 벗어나면 악도 못쓰고 음, 음 하는 거지요. 음, 음 해오던 그 가 여기 이 모습에 좀 보이지요? 은 많이 벗어났지만. 그래서 이 에 화 3 요라고 이름을 붙이게 됐습니다. 은 보는 눈을 진다 대신에 보는 눈을 바르게 한다고 좀 부드럽게 씁니다. 진다 하면 좀 그렇지요? 그래서 은 바르게 한다로 고쳤습니다. 보는 눈을 바르게 한다. 보이는 모습을 바르게 한다. 잘 한다. 이 세 가지를 화 3 요로 대서특필하고 론을 표출하지요. 자, 여기에서 눈을 바르게 하는 일은 에서 다루어지게 됩니다. 에서 히 눈이 다루어지게 되요. 여러 편을 가만히 한 보세요. 눈이 다루어질 수밖에 없겠지요. 모습 에서 다루어지게 되요. 에서는 를 가지고 진지하게, 히 밀도있게 하게 됩니다. . 나눔. 론이라 하게 되면 론입니다. 이 세 가지를 으로 화 3 요라고 쓰되, 눈은 에서 다루고 모습은 에서 다루고 장에서는 를 다룹니다.

이제 해서 생각해봅시다. 너하고 나 사이에 나눈다, 한다. 그래서 이 는 나눔입니다. 나눔, 나누기예요. 나누기 어떻게 할 것인가. 마음 나누기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서 하나씩 뜯어보면 마음 나누기 어떻게 할 것인가의 길이 확 열립니다. 나누기의 내용은 무엇이겠어요? 마음을 나눈다 하지 않아요? 마음이 내용물입니다. 그러면 이 마음이란 무엇이냐? 마음은 쉽게 이분법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내 마음속에 무엇이 있어요? 어떤 마음들이 있어요? 내 마음속은 무슨 마음들이 있을까 하고 보십시오.

마음은 입니다. 하면 삼분법으로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라고 하는 것은 영역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을 겉마음과 속마음으로 나누어보자 하는 겁니다. 속마음과 겉마음. 그러면 상장을 받고 기뻤다, 하는 에서 상장을 받았음 이라는 내 마음속의 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상장을 받으니까 기뻤음, 기쁨이라고 하는 마음 요소가 또 하나 하게 됩니다. 상장을 받았다고 하는 과 상장을 받음으로 해서 기쁨이라고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것을 속마음, 겉마음으로 한다고 하면 상장을 받음 이것은 겉마음입니까? 아니면 속마음입니까? 이것은 겉마음이고 기쁨이 일어났어, 기쁨, 그것은 속마음입니다.

마음을 이 두 가지로 생각하고 속마음과 겉마음 이 두 개를 내 속에서 한동안 익혀만 두면 살이가 아주 좋을 겁니다. 이것이 마음공부의 입니다. 마음공부의 가 무엇이냐. 속마음과 겉마음으로 나누어서 나를 바라보아라, 하는 것입니다. 이래놓고 바라볼 것 같으면 어떻습니까? 내 마음을 바라보면 유치원생 일기 쓰 듯이 됩니다. 어디 한 번 유치원생 일기 쓰 뜻이 떠올려 볼까요?

엄마가 나를 예쁘다고 하셔서 기뻤다.

이런 으로 쓰게 됩니다. 그러니까 유치원생. 초등학생 1학년 일기 쓰 듯이만 열심히 하라 는 겁니다. 어른들이시여, 유치원생이 되소서. 이 유치원생이 천진하게 마음을 들여다보고 마음을 노래하는 이 노래를 어른들이시여, 왜 다 잊어 버리셨소? 하는 겁니다. 또 유치원생은 어때요?

아빠가 용돈 만원 주셔서 뛸 듯이 기뻤다.

이렇게 씁니다. 그러니까 아빠가 용돈을 줌, 여기까지는 겉마음이고 기뻤음, 이것은 속마음입니다. 엄마가 예쁘다고 한 것, 이것은 겉마음이고, 기뻤음, 이것은 속마음입니다. 이 두 가지 연습을 계속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공부의 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을 선명히 하게 되면 내 마음이 이분법으로는 선명하게 보일 겁니다. 그리고 마음을 보아야 이분법밖에 없어요. 내 마음을 보려고 한다 해도 한 것이 아닙니다. 이분법밖에 없습니다. 마음 나누기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할 일은 이분법 마음만 열심히 읽고 토해내면 그것이 마음나누기의 한 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는 ‘엄마가 예쁘다고 해서’까지를 촛대라고 하고 ‘기뻤다’를 불꽃이라고 해서 촛대 + 불꽃 형식의 문장을 수없이 쓰게 합니다.

그럼 마음 나누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내 마음을 에게 주는 것이 나누기의 하나입니다. 주기는 어떻게 한다고 했지요? 꾸지람 듣고 슬펐다고 하는 것이 주기입니다. 마음 나누기는 너와 나 사이의 에서 이루어지니까 내가 에게 마음을 주었다면 어때요? 은 내가 준 마음을 받아 주어야 합니다. 받기를 해야 됩니다. 받기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마음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저차해서 기뻤다, 저차해서 답답했다, 하고 주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또 어찌해야 됩니까? 마음을 받아주어야 하지요. 그러면 내가 해야 될 일은 에 따라서 주기도 하고 에 따라서 받기도 하는 것이 마음나누기의 입니다. 한 이론은 싸악 빼버리고 이 운동만 하는 겁니다.

무엇이나 할 때 이분법으로 하도록 가르쳐라 하는 것입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나부터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받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도 시켜 주어야지. 시켜주려면 무엇이 됩니까? 내가 그렇게 해야지요. 여러들이 받기 할 때 에서는 몇 가지를 시킵니다. 싸악 빼버리고 받기 3박자만 하라. 그리고 옵션으로 받기에 떨어지지 말하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받기 3박자는 무엇입니까? 받기 3박자는 그대로 읽어주기(경청), , 알파입니다. 하고 하고 적당한 알파를 덧붙이는 것이 받기의 입니다. 받기는 또 뭐라 그랬어요? 청, 한풀이, 충고, 화, 비교 받기입니다. 이렇게 모두 이론으로 정립이 되어졌는데 이론으로 정립이 된 것을 머릿속으로 하는 것은 입니다. 그런데 이 아니라 지혜 이 되어야 합니다. 에 “아하!”가 수식으로 붙어야 지혜가 되는 입니다.

주기란 촛대불꽃으로 하는 겁니다, 주기란 촛대불꽃으로 하는 겁니다, 주기란 촛대불꽃으로 하는 겁니다. 이런 식 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내용인데 지혜가 됩니다. “아! 맞다. ‘상장 받았어’에서 끝내지 않고 상장 받아서 일어난 느낌을, 그래서 ‘기뻤다’까지 할 것 같으면 내 속에 들어있는 따끈따끈한 감정까지 되니까 얼마나 시원한 이겠냐. 정말 할 때는 그래야 되겠어!” 이것이 지혜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들이 무엇인가를 익힐 때는 으로 익히지 말고, 그 이 “아하!”가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받기란 , , 알파입니다. 이 상장 받고 기뻤다고 하면 그것을 해서 당신 상장 받고 기뻤단 말이지요. 음, 그 마음 알겠네요. 음, 합니다.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자 받기란 3박자로 하는데 에서 ‘그러셨다고요’, 에서 ‘아이고 그러시겠습니다’, 알파 에서 뭣하나 붙이고.... 이런 것이 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냐. “받기 3 박자, 이라. 그래, 말로 하겠다. 아하! 이 진짜하겠다. 왜냐? 이 말을 했으니까 을 확실히 해야지. 저차해서 그러기로 했단 말이지요, 할 때 이 와, 내 말이 되었구나 하고 얼마나 시원할까. 이 되어야지.” 이것이 지혜고 덕입니다. 은 덕이 아니에요. 지혜가 덕입니다.

은? “그랬다면 당신 정말 슬펐겠네요. 아이고, 당신 그랬다면 너무너무 기뻤겠네요. 이때 얼마나 이 통쾌하고 좋을까. 그런 을 해준 다는 것이. 거기다가 한 수 보태가지고 아이고, 안됐습니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 것이 없을까요 한다든지. 아이고, 합니다 한다든지, 무엇인가 알파까지 붙인다고 한다면 이 내가 온전히 를 받아주시는구나 하면서 흐믓해 할 것 아니냐. 그런 는 좋을 것 아니냐. 말로 받기 3 박자 으로 받아야 되겠구나.” 이것이 지혜입니다. 그것이 덕입니다.

받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받기는 청이고 한풀기이고 충고이며 화이고 비교입니다. 이렇게 하지 마십시오, 하는 이것은 입니다. 아하!가 있어야 지혜입니다. “그래, 맞아 맞아. 우리는 할 때 의 얘기를 겉으로는 듣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얘기할 것만 준비하고 있잖아. 청을 하고 있잖아. 그렇다면 이 얼마나 갑갑하겠어. 을 바꾸어봐. 내가 얘기하는데 은 들어주지도 않고 겉으로는 들어주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딴 궁리만 하고 있으면 얼마나 밉겠어. 와~ 정말 청, 이거 안되겠네.” 이래야, 그거 정말 안 되겠다고 해야 그것이 지혜고 덕입니다.

“한풀이 받기도 마찬가지야. 이 우리 시어머니 때문에 죽겠다고 했는데 한풀이 하는 사람은, 자네 시어머니가 그랬다고? 우리 시어머니는 어떤 줄 알아? 하면서 시어머니 탓을 한참 하고 있다면 그 자리가 어떻게 되겠냐. 말로 저차 했으면 그것을 히 받아주고 나서 내 이야기 해야지. 받아주는 둥 마는 둥 해놓고 얘기를 쫙 깔아 놓을 것 같으면 무대에 올라가 있는 사람 끌어 내려놓고 내가 무대에 올라 갈뿐이지. 정말 이거 안 되겠네. 또 충고 받기도 그렇지. 우리 시어머니 때문에 죽겠단 말이야 하니까 자네가 하소, 그 따위로 충고한다고 해봐. 가 어떻게 되겠냐. 원수져요. 원수지려고 작정했다면 몰라도 무엇 할라고 충고를 뽁뽁 해대겠어. 아, 그 충고, 정말 할 일이 아니야.” 이런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충고는 요청하더라도 하지 마십시오. 요청하더라도 충고 해줬다 하면 들으면서 싸늘해집니다. 그래 놓고는 3년간을 씹어요. 누구는 충고해주는 것 몰라서 가만 있나? 하면서 말입니다.

그 다음에 화 받기를 봅시다. “아, 우리 아들 J대 들어갔단 말이야. 온 집안이 경사네.” 그러면 “아이고, 그러는가. 너무 좋겠네. 하네.” 이로 끝내면 좋을 것을 “아, 그런데 홍순이 딸도 J 대 들어갔고, 경숙이 아들도 J 대 들어갔다고 하데.” 이 따위로 화를 시켜버리면 내가 아주 원수 대접을 한 짓거리입니다. 말로 은 할 일 이 아닙니다. 이 크던 적던 경사 속에 있다면 히 함께 해주고, 해주고, 쳐주고, 격려해주고 해주고 해서 깨끗이 그 사람을 띄워줘야지 거기다 대고 내가 찬물을 쫙 뿌리는 짓거리를 하면 안 됩니다. 거기에 대고 비교까지 하면 더 안 됩니다. “우리 아들 J 대 들어가서 우리 집안 경사 났는데” 하니까 “그랬는가, 하네”까지 해놓고는 그런데 말이야, 아무개 아들은 S 대 들어갔대, 요 따위 소리를 해버리면 안 됩니다. 이런 으로 받기를 할 때 범할 수 있는 는 5대 받기라고 이야기를 하나 받기가 어디 5대 뿐이겠습니까. 6대, 7대, 8대, 100대라도 됩니다.

섬세하게는 이 잘못된 받기 형식은 수없이 있을 수 있습나다. 그래서 깨어 있으면 됩니다. 깨어 있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받는 자리는 한 자를 기쁘게 해주는 자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쁘게 해주는 자리니까 내가 거짓말로라도 기쁘게 해줘야 되겠다 하는 것은 어때요? 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성공할지 모르나 내가 진실을 어겼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무엇 하려고 하나를 올리기 해서 하나를 죽입니까? 윈윈(win-win)이 되어야지요. 을 기쁘게 해주자고 하니까 기쁘게 할 작정으로 예쁘지도 않은데 예쁘다고 해대고, 별로 크게 치고 싶지도 않은데 막 를 쳐대고 하면 보기가 싫어요. 그러니까 내 속에서 일어난 정보, 내 속의 이 진실을 하면 이 좋아하겠다 하는 것이 요, 입니다.

여기까지 알고 인들은 이것을 속에서 실천하십시오. 그리고 가르치는 자리가 되면 에 따라서 여기에 플러스 알파로 옵션을 조금 붙여도 좋습니다만 옵션을 안 붙이더라도 위의 것만 정확하게 해서 사람들이 주고받고 하는 것이 이 만 되게 한다 해도 훌륭할 것입니다.

보강을 조금 하겠습니다.

마음나누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가 던져지면 인이라고 하면은 나눔 으로 떠오르고 그 이 지혜와 덕이 되게 해야 합니다. 마음 나눔이라는 것이 무엇이지요? 나하고 너 사이에 주기 받기 아닙니까. 그 주기 받기 하는 가장 이상 이 어떤 일까 을 해보면 몇 가지 이 딱 떠오릅니다. 나하고 너 사이에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 벌어집니다. 나하고 너 사이에서 내가 해야 하는 것은 에 따라서는 주기도 하고 에 따라서는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를 뺀다고 하면 주기를 뺄 수가 있습니다. 주기는 I (one)입니다. 내가 에게 내 마음을 줄 때는 내 속에서 두 됩니다. 내 속에서 내 마음을 내가 감지하는 이 하나 있게 됩니다. 감지하는 하는 것입니다. 이 감지되는 되지 않고 지껄여댔다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실속이 없는 얘기를 하게 되고 포커스가 마음에서 대단히 빗나간 를 하게 되요. 늘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말은 하는데 마음이 들어 있지 않은 말만 해, 하는 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말이 제대로의 말이려면 말에 마음이 담겨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담기려면 마음을 감지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감지해서 하는 것이 I (one)입니다.

그 다음에 받기가 있어요. II (two)를 받기라고 합니다. 내가 받기 이 될 때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 마음을 드러냈을 때 그 마음을 내가 받아야 합니다. 받기도 마찬가지로 내 마음에서 두 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입니다. “이이고, 영하20도가 되는 날, 내가 밖에 나갔다왔는데 얼마나 춥든지 얼어 죽는 줄 알았다.” 이런 이 했다면, 나는 받기를 해야 하는데 그때 추웠을 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고, 영하20도라면 굉장한 날인데 정말 추웠겠다. 추웠을 게 너무나 가 된다.” 하면 이 되고 그 한 것을 말로 드러내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때의 은 반응이라고 합니다. 과 반응입니다.

그런데 주기 받기의 두 축에 되는 대단히 한 요소 하나가 있어요. 그 요소가 무엇이냐 하면 두 축 밑에 붙어있는 토대입니다. 그것은 입니다. 그래서 의 지평위에 감지, 하고 , 반응 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나눔 이라고 합니다. 이 때 이 대단히 합니다. . 이 있고 없음의 는 엄청납니다. 내가 해서 깊은 을 가지고 을 한다고 해봅시다. “여보게, 내가 말이지 오늘 시장에 갔는데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저차해서 이렇게 저렇게 해서 이런 사건이 있었단 말이지. 그 때 내 마음은 참말로 했어.” 이런 으로 을 가지고 을 할 때는 하는 속에 깊은 에너지가 싸악 실려서 됩니다. 받기 할 때도 마찬가지로 해서 을 가지고 반응 하게 되면 반응을 하는 내 언어 속에 어떤 정성, 어떤 사랑, 어떤 , 이런 것들이 에너지로 딱 전해져서 반응이 되기 때문에 이 들은 꽹과리 소리가 아니고 범종 소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라고 하는 것이 대단히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감지, , 반응하지 않고 만 쫘악 가지고 침묵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의 에너지가 그 사람을 싸악 감싸면서 보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 사람은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저 사람에 한 감이 너무 좋아, 하는 이 벌어질 수 가 있어요.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지 않더라도 만 제대로 가지고 있다고 하면 에너지 에서는 히 큰 역할이 된다는 말입니다. 한 에 할머니 한 분이 말없이 묵묵하게 산다고 상상해 보세요. 할아버지 한 분이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요원들에게 할 말은 없어요. 그러나 요원들에게 깊은 사랑을 가지고 어슬렁어슬렁 김도 매고 호미질도 하고 그런다고 해봅시다. 그 때, 그 한 분이 요원들을 마음속으로 다 보듬어 안고 있는 것입니다. 은 안 해도. 그러니까는 그 한 사람의 의 큰 밑거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의 지평 위에 감지, , , 반응을 적절히 한다고 하면 이고 주기 받기는 입니다. 감지와 을 하나만 가지고 말하면 감지가 체이고 이 용입니다. 과 반응을 논한다고 하면 이 체이고 반응이 용입니다. 나눔 를 체와 용으로 나눈다면 이 체이고 주기 받기가 용입니다.

자 그래놓고, 마음나누기에서 몇 가지 는 여러 들이 으로 알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을 놓고 여러들이 로 들고 있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적절한 의 있고 없음의 가 크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을 딱 해야 될 자리에 그 을 안 했기 때문에 죽을 수도 있고, 죽을 사람이 그 을 했기 때문에 살 수 있는 이 얼마든지 벌어집니다. 꼭 목숨이 사느냐 죽느냐 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다’, 하는 을 가지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가 있어요. 을 했더니 길이 열리는 겁니다. 그 다음 은 ‘의 부재는 의 부재다’ 인데 이 도 아주 좋습니다. 의 부재는 의 부재다. 그러니까는 여러들에게 여러 예들이 떠오르지요? 내 속에 사랑이 있으면 사랑을 하라. 내 속에 진실이 있으면 진실을 하라. 되지 않는 것은 없음과 같습니다. 그런 에서 의 부재는 의 부재다 하는 이 딱 맞아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 받기 에서 받기 축을 보면 속에 들어가서 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중심이라는 말이 로 좋습니다. 중심. 이 말을 하게 되면 내 에너지가 말하는 속에 딱 꽂혀 있어야 되요. 마치 이 의 한 중심에 저 사람 밖에 없는 것처럼. 그래서 는, 을 하고 있는 자는 그 인 겁니다. 그래서 중심 이라는 도 우리들이 가지고 살면 많은 에 그것이 약재 노릇을 할 것입니다.

메아리 없는 산은 죽은 산이다. 이 히 좋은 말입니다. 메아리 없는 산은 죽은 산이다. 어떤 사람이 을 했는데 메아리를 하지 않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메아리가 있으면 좋을 자리에 메아리가 없이 흘러 가버렸다고 하면 유감이지 않습니까? 야호~ 하면 앞산에서 야호~하고 메아리가 와야 그 산이 살아 있는 산일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야호~했는데 메아리가 오지 않는 산은 죽은 산이지요. 마치 그 죽은 산을 향해서 야호~하는 것과 같은 이 벌어진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이 야호~했으면 여기서 야호~하고 메아리를 보내주는 거예요. 그것이 받기를 의미하는 겁니다. 받기의성을 調 하기 해서 메아리 없는 산은 죽은 산이다 하는 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받기의 핵은 어디에 있지요? 입니다. 속마음을 알아주는 것, 이것이 입니다. 그러면 저 사람이 내 속마음을 알아주는 구나 할 때 나는 완전히 사랑 받는, 받는, 배려 받는, 감 속에 싸악 들어갈 수가 있어요. 그래서 속마음 알아주는 것이 사랑인 거예요. 속마음 알아주는 것이 실존적 사랑이다. 이런 로 가지고 살면 좋습니다.

이런 들을 가지고 이 에 살다가 그 때 그때 으로 그 자리를 메꾼다고 하면 밥값을 제대로 해내게 될 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을 배경에 깔고 마음 나누기를 해 가라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