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11 講 죽음 暝想
安寧하세요.
前生에 보고 또 보네요. 이 時間 工夫 主題 는 죽음 暝想입니다. 于 先 죽음 暝想을 煩惱 構造로 整理해 봅시다. 자, 槪念 以前입니다. 槪念 以前이라 하면 무엇으로 느껴집니까? 이것이 極 樂이고, 解脫 이고, 無爲이고 道이고 그리고 理想鄕입니다. 理想 鄕에서 첫 墜落이 實體 思考이고 다음으로 바로 이어서 銅錢의 兩面처럼 價値 思考 가 展開됩니다. 이어서 價 値 附與를 한 만큼 欲 求가 일어나고, 欲求 하게 되면 所有하고자 하는데 마음대로 안 되니까 憤怒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欲求 , 憤怒, 欲求, 憤怒를 수없이 經 驗을 하면서 또 하나의 강력한 信念인 불만 思考가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實體 思考, 價 値 思考, 不滿 思考이 思 考들이 옳은 思考냐 하면은 全部 잘못된 思考 예요.
本來 實體가 없는데 實體가 있다고 생각하니 어리석음이요, 本 來 이것은 그냥 이것일 뿐인데 얼마짜리라고 價値 를 附與하는 價値 思考자체가 맞지 않으니까 이것도 어리석음이요, 只今 넘치는 幸福 속에 있는 法인데 불만을 하고 있으니 不滿 思 考도 어리석음이어서 이것이 어리석을 痴입니다. 欲 求는 貪 이고 憤 怒는 瞋이라고 합니다. 幸 福 公式을 보면 [幸 福 = 所有 / 欲求]입니다. 幸福 公式 속의 이 欲求 가 煩惱 構 造 속의 이 欲求입니다. 이 欲求의 뿌리에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또 이것의 結 果로 憤怒가 바로 따라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幸福 公式 의 欲求는 欲求를 代表 槪念 으로 썼을 뿐이지 이 欲求를 잘 들여다보면 이미 어리석은 痴가 前提가 되고, 또 바로 憤怒가 前提됩니다. 憤怒가 바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欲 求는 바로 貪, 瞋, 痴 입니다. 이 貪, 瞋, 痴 의 程度만큼 幸福은 누리기가 어렵다 그겁니다. 卽, 貪, 瞋, 痴의 最小化 가 幸福을, 幸 福 解脫을 決定한다는 말입니다.
죽음 暝想이라고 하는 것은 煩惱 構造의 貪 部 分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幸福 公式에서의 欲求 部分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을 貪, 瞋, 痴라고 한다면 貪, 瞋, 痴의 部分 집합인 이 貪을 다루는 것이 죽음 暝想 입니다. 앞에서 說明 했듯이 내가 이 瞬 間에 다가오고 있는 죽음을 受容할 수 있느냐고 딱 묻는 瞬間에 무엇 때문에 受容 이 안 된다 하는 무엇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면 그 무엇 때문에 죽음을 受容할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죽음을 受容할 수 있어야 좋겠어요? 아니면 拒否 해야 좋겠어요? 죽음은 이미 왔으니까, 갈 수 밖에 없으니까, 내가 죽음을 受容하는 것이 길입니다. 그러면 拒否하고 있으면 어찌 하겠어요? 只今 3 秒 後에는 죽게 되어 있는데 3 秒 동안에 안 죽어, 안 죽어, 안 죽어, 안 죽어, 하게 되면 안 죽어, 안 죽어, 안 죽어 하는 그 自體가 볼품도 아니고 안 죽어, 안 죽어, 안 죽어 하는 그 에너지가 그 혼 속에 强烈한 스트레스로 되어서 다음 世上에 훌륭한 家庭에 태어나고 싶더라도 그 强烈한 어리석음, 强烈 한 欲求, 熾 烈한 스트레스 이것 때문에 좋은 家庭 에 태어나지를 못하는 法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受容입니다. 受容이 되게 하려면 무엇 때문에 내가 못 죽겠다 할 때 그 무엇에 對해서 暝想을 잘 해서 내 속에서 그것을 放下시켜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그 무엇을 整理 하는 心理的인 過程을 죽음 暝想 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죽음 暝想은 왜 한다고 했지요? 죽음 暝 想을 하면 欲求 內容이 막 떠오른다고 그랬지요? 그 떠오르는 欲求 內容만 잘 整 理하게 되면 내 속에 있는 重大한 欲求는 다 解決 됩니다. 그래서 欲求를 淸 掃해 버리기 爲해서는 欲求 를 發見해야 되고, 發 見했으면 그것을 치워버려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내 속에 있는 欲 求 念體를 淨化하기 爲해서 죽음 暝 想 이라고 하는 것을 道具로 씁니다.

자, 죽음 暝想을 할 때 여러分들이 第一 留念 해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어요? 그것은 죽음 暝想을 할 때의 眞 正性입니다. 眞正性. 實感이 날수록 좋다는 말입니다. 이빨 쑤셔가면서 죽음 暝想하자 하니까 그래 죽음 暝 想또 해보자. 그래 죽음 온다고 하자. 내가 受容 할 수 있냐. 잘 안 되네 어째서…… 이런 式의 에너지로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正 말로 죽음이 只今 왔다고 보고 이 죽음을 受 容할 수 있겠느냐를 물어야 됩니다. 흑백的으로 어느 선을 넘어서야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可能하면 좀 더 진지하게, 좀 더 진정하게, 아니 實 際로 죽음이 바로 와있을 수도 있어요. 여러分들이 1분 후까지 살아있으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그런데 1분 후에 죽음이 안 옵니다. 죽음이 1분 후에 안 와서 또 살아지고, 또 살아지고, 또 살아지고, 그러니까 한 500년 더 살 것 같은 그런 감이 들지요? 左右之間 實感, 이것이 留念 點1 番입니다.
자, 實際로 죽음이 앞에 와서 가자 한다고 딱 想 像을 해보십시오. 내가 暝想을 할 때 가장 진지하게 하는 暝想이 죽음 暝想입니다. 죽음 暝想할 때 내가 第 一 森嚴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그래질까요? 다른 暝想은 그냥 하면 됩니다. 그런데 죽음 暝想같은 境遇는 어때요? 우리 모두 하자고 하면서 마스터가 죽음 暝想 을 適 當히 하고 있으면서 當身들 죽음 暝想해봐 한다면 그 에너지가 通過 되겠어요? 안됩니다. 特히 죽음 暝想 같은 境遇는. 그런데 내 속에서는 眞 짜, 正말로 죽음이 왔다고 보자 하면서 暝想 할 때 實感度를 높이는 겁니다. 죽음이 와서 가자고 할 때 참말로 죽은 것처럼 가는 것입니다. 勿論 想像이지요. 딱 想像을 해봅니다. 그 때 무엇 때문에 잘 못 가겠어 하는 그 무엇이 걸려드느냐를 봅니다. 여러分들은 只 今 죽음이 가자 하면 갑시다 하면서 잘 가집니까, 아니면 뭔가 남아 있습니까. 어디 只 今 한番 暫時 해봅시다. 자, 只今 죽음이 앞에 왔습니다. 와서 여러分 에게 갑시다, 그럽니다.
그 때 順順히 따라가지느냐 아니면 그 무엇 때문에 얼른 안 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 무엇인가가 잡힌다면 잡히는 그것을 딱 잡아 보십시오. 잡히는 것 없으면 죽음 暝想 完了이고 只今 잡아 보십시오. 무엇이 걸립니까? …............ 이程度 時 間이면 잡혔지요? 어디, 나는 안 잡히고 쓰윽 가지네요 하시는 分, 손 들어봅시다. 한 分, 두 分, 셋, 넷, 다섯, 여섯. 여섯 분을 믿어야 될 것인가. 믿어야지요. 나는 方今 해보니까요 내일이면 이 講義 課程을 마치는데 只 今 가자고 하면? 只今 가자고 하면은 조금 그렇기는 하다 하고 살짝 걸려들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 無等山님 계시고 열매님도 계시잖아요. “아이고, 龍陀스님 죽어버렸다고 하더라. 참말로 어떤 遺憾도 있지만 한便 시원하기도 하다. 우리끼리 協議해서 여기에 無 等山님도 계시고 열매님도 계시니까 두 分 中에 가위바위보로 이긴 사람보고 龍陀 스님 하던 것 이어서 하시게 하자.” 이러면 훨씬 新鮮한 局面 轉換으로 더 좋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전혀 노 프러블럼이었습니다. 이것이 살짝 걸렸다는 의미는 아니었어요. 이것이 걸릴 수 있겠구나 하고 그쪽에 머물러 보니까 내 智慧의 소리가 무어라 했겠습니까? “아. 無等山님 계시고 열매님 계시지 않아.” 하는 答이 딱 있으니까 안 걸렸습니다. 그리고 설혹 두 分이 안 계신다고 하더라도 여러分들, 아따~ 나, 삼 일 동안 묶여있을 판이었는데 하루 벌었다, 하면서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할 수도 있어요. 아무튼 方今 손 드신 分들은 祝賀 드립니다. 그건 좋은 일이구요.
그래서 實感이重要 합니다. 實感이 나야 걸리는 것도 더 鮮 明히 잡힙니다. 그래서1 番 留 念點은 實感입니다. 죽음 暝想했다 하게 되면 留 念點 다섯 가지는 機械 的으로 서있어야 됩니다. 1 番은 實感이고 2 番 留 念點은 직면입니다. 只今 죽음이 가자고 했을 때 여러 分 속에서는 그 다음에 무엇이 따라오겠어요? 實感度를 높여서 그래 只 今 저 죽음, 가자고 하는 죽음의 사자를 따라서 내가 간다고 할 때 무엇 무엇이 걸리는지 그 아이템들을 딱 딱 딱 정확하게 잡는 것입니다. 그것이 직면입니다. 직면은 걸리는 것을 딱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아 봐야 다섯 개程度 일 겁니다. 대체로 하나나 둘, 아니면 세 개? 여러分들은 평소에 죽음 暝 想하면 몇 가지程度 가 잡혀요? 다섯 개 이상 잡히는 사람은? 다섯 개 이하는? 그럴 겁니다. 다섯 개까지는 걸리지 않습니다. 그것을 직면해서 무엇, 무엇 하면서 다섯 개 程 度가 잡혔습니다. 그러면 세 번째 할 일은 무엇이겠어요? 직면의 內 容은 全部 槪念으로 되어 있고, 문장으로 되어 있어요. 이러이러하지 못해서 遺 憾이지 않아, 하는 식과 같은 문장으로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아이고, 내가 죽어버린다면 내가 只今 모시고 있는 老母님이 완전히 불행해질지 모르겠는데, 이처럼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직면한 다음 3 番 留 念點은 무엇인가. 轉換 입니다. 이 문장들을 轉換시켜야 됩니다.
어떻게 轉換시킬까요? 아이고, 내가 팔십이 넘은 老 母님을 모시고 있는데 내가 죽어버리면 그 老母 님이 너무너무 비참해질 것 같아. 그러니 못 가겠어. 어머니 때문에 못 가겠어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문장을 어떻게 轉換을 시키지요? 그래 일차적으로는 이렇게 생각이 되지만 한 생각 더 돌려보면 엉뚱하게 횡재的인 사건이 일어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 어머니는 내가 죽게 될 것 같으면 약간 치매기도 있고 해서 틀림없이 거리에 나가서 집을 못 찾고 어정대면서 아이고, 내 아들 어디 갔어? 이런 式으로 거리의 할머니가 될 것이다. 그때 운 좋게도 龍 陀스님을 만났어. 龍陀 스님이 아니, 누구십니까? 하니까 아무개가 내 아들인데 아들놈이 어디 가서 안 온단 말이오, 하게 되면 아이고, 그 아들 죽어버렸소. 그러니깐 내가 대신 아들 노릇 해줄 테니까 내 절로 갑시다. 절에 가서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시켰는데 어머니가 염불 三昧 들어가 한 통을 해서 그냥 極樂에 확 가버렸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極樂에 가실 분을 내가 모신다고 붙들고 있는 나머지 어머니 신세를 내가 망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을 轉換하는 것입니다. 죽을 바에야 그렇게 생각을 얼른얼른 轉換 해버려야지요. 또 事實 이 그럴 수도 있으니까. 이렇게 해서 걸리는 문장을 轉換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씩 轉換될 때마다 그에 따라오는 느낌이 있습니다. 4 番 留念點은 그 느낌을 느끼는 것입니다. 轉換됨으로 해서 오는 느낌이 있습니다. 모든 감각 認 知 過程에는 그에 相 應하는 느낌이 隨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을 딱 轉換할 때 오는 解脫감. 그 때 무엇인가 마음이 탁 놓여지는 感 . 그것에 걸려서 답답했던 마음이 轉換되버리니까 딱 解決된 개운한 감. 개운하고 시원해지는 그 감. 그 감을 크게 表現 하자면 解脫감입니다.
그런데 여러分들은 解脫이라 하면 너무도 유별나게 생각합니다. 解脫 하려면 一旦 6년간은 苦行해야 돼, 이렇게 생각합니다. 解脫도 大解脫 이 있어요. 그런데 中解脫 도 있고 小解脫도 있고, 쏠쏠하고 자잘하고 미세한 解脫들이 얼마든지 있는 겁니다. 그래서 解 脫 槪念을 유별나게 부처님의 보리수 하의 大覺처럼만 생각하지 말아라 하는 겁니다. 그것은 아주 높은 수준, 大覺 이고, 잘잘한 中覺, 小覺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걸렸던 것이 轉 換되면 解脫감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4 番까지 되면 죽음 暝想은 完了됩니다. 이것 轉換 됐고, 이것 轉換됐고, 이것 轉 換됐고, 이것 OK, 이것 OK 하면 걸렸던 것 全體가 轉換되어서 解 脫감으로, 개운해진 감으로 딱 느껴지게 되면 죽음 暝想의 完了입니다. 이제 正말로 죽음이 가자고 할 때 갈 수 있겠느냐. 응 갈 수 있겠어, 합니다. 그런데 이 걸리는 레파토리 중에 生命 自體가 없어지는 것에 對한 喪失感 受 容이 안 되서 못 가겠네요, 하는 걸림點은 다 있을 것 같은데 暝 想중에 체크해 보면 그런 얘기를 안 하는 사람이 훨씬 많아요. 그것 참 신기합니다. 죽음 暝想자리에서 質問 을 합니다. 죽음을 가로 막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런 대답은 안 나옵니다. 그러면 當身 生命이 끊어지는 것에 對한 무슨 마음은 없느냐 하면 그것은 별로랍니다. 그런 사람들 신기한데, 前生부터 道人같아요. 내 境遇는 누구 때문에 어쩐다 그런 거 별로 없어요. 나에게 있어서 죽음 暝想 의 가장 決定的인 것은 밖의 무엇 때문이 아니라 이 生命 自體가 끊어지는 것에 對한 억울함 같은 것, 끊어지는 것에 對한 어떤 안 좋음, 이런 것이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런데 그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生命이 끊어진다는 것에 對 한 무슨 여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 그것이 있어야지.

석가모니는 오직 그거 하나였어요. 事實은. 그러기 때문에 自 己가 王 노릇을 해줘야 될 狀 況인데 그 王 자리까지도 팽개쳐버리고 갔잖아요. 左右之間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이고 얼른 共感 이 안 되더라는 것이지 實際로 그렇다 하면 그 사람은 평소에 自己 生命에 對한 애착이 별로 없이 가볍게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어요. 그것을 나쁘다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얼른 共感 이 안 되어서 나는 그것에 너무도 잘 걸렸는데 當身은 안 걸리냐 하는 마음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의미가 하나 더 있어요. 죽음 暝想을 하는 過 程에 의미가 건져지게 됩니다. 죽음 暝想 이 完了 안 되더라도 의미가 건져지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쏠쏠하게 좋을 수가 있습니다. 그 의미 건지기 중에서 내가 관찰해본 중에 印象的 이었던 것은 “내가 眞짜 내 아무개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됐다” 하는 식입니다. “내가 내 家庭을 正말로 사랑하고 있구나.” 이런 말들이 막 나옵니다. 그러고 또 어떤 사람은 무슨 의미를 건졌느냐 하니까 “이제 正말로 잘 살아봐야 되겠다” 합니다. 그렇게 늘 의미가 건져집니다. “내가 아무개 아무개한테 너무 잘못하고 只今까지 살아왔는데 正말로 잘해줘야 되겠다.”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의미를 쏠쏠하게 건집니다. 그래서 5번 留念 點인 의미 건지기까지가 죽음 暝想 입니다. 의미까지 건질 것 같으면 죽음 暝想괜찮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서 죽음 暝想 이 어느程度 完了가 됐다 하면 이 煩 惱構造사슬 중의 欲求가 쉬게 됩니다. 또 幸福 公式으로 말하면 欲求 部分이 놀라웁게 극소화됩니다. 좋지요?
그리고 죽음 暝想을 거듭 하다가 보면 버전이 자꾸 바뀝니다. 그리고 처음에 무엇 때문에 못 죽는다, 하는 이런 것은 죽음 暝想初期에나 뭣 때문에, 레파토리 1, 2, 3 때문이라고 하지 죽음 暝想 이 잘 되게 되면, 只今 내 境 遇는 걸릴 것 하나도 없어서 참으로 좋습니다. 죽음 暝想을 하게 되면 난 참 幸福합니다. 죽음 앞에다 幸福하다는 말까지 붙이면 여러分들이 共 感 을 할런지 어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온다, 그래요. 죽음이 온다. 그리곤 간다, 그래 봅니다. 간다, 할 때 걸린 것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 죽음 暝想을 가장 簡 單히 하고 동그라미를 치는 境遇는 온다, 간다, 걸림 없다. 그렇게 하고 동그라미를 칩니다. 온다, 간다, 걸림 없다. 그렇게도 죽음 暝想 이 發展되어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죽음의 主 體가 本來 없지 않아요? 어디에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있느냐. 無常이, 변화가 있을 뿐이지 어디에 죽음이 있느냐, 그러게 되면 죽음 暝想자체가 暝想 主題도 안 됩니다. 그래서 죽음 暝 想하게 되면 변화가 있을 뿐 죽음이 어디에 있느냐, 그러면 깨끗해져 버리거든요. 그리고 동그라미 칩니다. 좋지 않아요?
이것 以前에는 이런 것도 있었어요. 히말라야의 참새 한 마리가 겨울에 추우니까 춥다, 춥다, 춥다 하면서 똑 떨어져서 죽어. 참새 한 마리가 똑 떨어지는데 그 옆에 달랑달랑 붙어있던 龍陀가 춥다, 춥다, 춥다 하고 똑 떨어지는 걸 想像해 봅니다. 그래서 새 한 마리가 똑 떨어지는 걸 想像해보고, 龍陀 한 마리가 똑 떨어지는 것을 想像해보면서 이 둘 사이의 差異가 하나도 안 느껴지는 좋음. 差異 가 하나도 안 느껴지면서 그래 새 한 마리 떨어진 것이나 龍陀한 마리 떨어진 것이 무슨 差異가 있느냐 하고 볼 때 깨끗하게 差 異가 없이 그냥 同價로 느껴져요. 그게 참 氣分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또 동그라미 칩니다. 어떤 땐 또 낙엽 하나가 또로로록 떨어졌어. 龍陀가 또로로록 떨어졌어. 무슨 差 異가 있느냐. 그러니까 멀리 떼어놓고 건너다보면 그 自體가 解脫입니다.
그 以前에는 또 어떻게 했는지 말하지요. 딱 죽었어. 죽었는데, 죽어서 하루인가 이틀인가 있었는데 아니 70억 인류가 다 내 앞에 와서 웅성거리고 있는 거예요. 아니 너 말이야, 저쪽 地球에 있어야 되는데 왜 네가 여기에 있냐 했더니 나 80 살고 왔어요, 나 100세 살고 왔어요, 막 이러는 겁니다. 내가 죽어서 며칠도 안 되고 몇 時 間도 안 됐는데, 그냥 70억 인류가 다 와서 함께 내 앞에 웅성거리고 있다니까. 아, 그 想像을 해보니까 죽는다는 게 뭐 特別 한 일이냐 하게 됩니다.
죽음 버전이 이렇게 막 바뀝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것은 죽음 自體가 事實은 없지 않아요. 그리고 요새 해보는 죽음 暝想도 재미있습니다. 只今 죽음이 온다고 하는 대신 이미 보름 전에 죽어버렸다고 想像합니다. 보름 전에 죽어가지고 죽음 暝 想에 동그라미 치려고하면 딱 죽음 暝想 이 始作됩니다 그러면 이미 보름 전에 죽었어. 나는 화장터에서 화장을 해서, 龍陀화상 그냥 화장 막 해서 태워가지고 싹 없애버렸어. 龍 陀스님 영정이 성륜사에 가 있어. 49제 해준다고. 그런데 나는 너무 홀가분한 마음으로 내 49제 해준다고 寫眞 찍어 놔두었네, 이러고 돌아다니면서 재미를 보는 거야. 그러면서 아이고~ 너그들, 그 고단한 人生을 언제 다 살고 올래. 나는 이렇게 좋다~~ 하는 겁니다. 이 죽음 暝想은 메뉴가 그렇게 多樣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여러分들, 죽음 暝想을 늘 해보세요. 해보면 처음에는 심각하고 熾烈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熾 烈 시대가 지나가게 되면 대단히 藝術 적이 됩니다. 藝術이. 藝 術的으로 죽음을 관조하는 재미 속에 있게 됩니다. 자, 아무튼 한番 은 죽음이 온다, 이 말도 참 맞지 않는 소리입니다. 한 번은 온다. 한番은 죽음이 오지 않아, 이렇게 말을 했다 해봅시다. 그 말하는 그 사람은 죽음이 相當히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심각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 分들은 죽음이 심각하다고 하면 나에게 할 일이 많구나, 그렇게 여기시고 어서 죽음 暝想이 마치 숨 쉬는 것과 같이 自 然스러운 境地에 올라가시도록 하십시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언제 죽어도, 사라져도 상관없는 마음으로 가볍게 사는 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感謝합니다.